열고
남철은 한 발 물러나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최 계장님! 하지만 오늘은 그냥 모른 척 해 주세요. 서 팀장님이랑 술 약속 하셨다면 제가 대신 상대해 드릴 게요."
강연이 무슨 말을 하기 전까지는 허리를 펴지 않을 기세였다. 매일 사과만 하며 다니다 보니 이쯤 허리 숙이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건가? 하지만 남철은 분명 필사적이었다. 자신과 저 둘이 마주치지 않도록 이것저것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도, 로비 끝에서 달려와 강연을 붙든 것도.
강연은 고개를 돌려 문 바깥으로 어른어른 비치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진수는 현민의 것이 분명한 고급 자동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린 놈이, 소중한 아가씨 모셔 가듯 문을 닫는다. 곧이어 눈을 깜박인 차는 꽁무니로 매연을 털어내며 훌쩍 떠나 버렸다.
이쯤 되면, 가서 잡을 수 없다.
도대체 너희들의 진의는 뭐냐. 서진수, 네녀석은 무엇 때문에 저 어린 놈에게 끌려다니는 거냐. 이현민, 네녀석은 무엇 때문에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애정의 대상을 멋대로 채어 가려 드는 거냐. 그리고 지남철, 네녀석은 무엇 때문에 나를 말리는 거냐.
항상 자신만 진심이고, 모든 것을 내보인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진심이 아니다.
남철이 간곡한 목소리로 재차 부탁했다.
"두 분만 이야기하도록 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다신 이런 부탁 안 드릴게요."
"제대로 서."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에 남철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강연의 표정을 살폈지만, 곧 현민과 진수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얼굴이 된다.
이 녀석은….
머리에 다시 피가 몰렸다. 저 강아지 같은 눈이 거슬린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동그란 얼굴이 거슬린다. 가슴에 모인 불덩이를 누구에게든 떨궈 내지 않으면 반 사회적인 범죄를 저지를 것 같다.
"상대해 주겠다고?"
"네."
퍽도 시원시원하게 말한다. 어느 새 남철의 얼굴엔 평소와 같은 천진한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그럼, 따라와라."
* * *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남철은 시원하게 넘어져 침대에 뒹굴었다. 평소의 버릇이라기보다 뒤에서 떠밀렸기 때문이었다. 역시 고급 호텔의 좀 좋은 방이라 침대도 폭신폭신하니 좋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등 뒤에서 계장이 취할 움직임은 대충 예상할 수 있었고,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아마 자켓을 벗은 뒤 넥타이라도 풀고 있겠지, 아주 급하고 거칠게…. 이를 어쩌나.
남철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예상대로, 계장은 넥타이를 바닥에 패대기치는 중이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하기 전, 남철은 먼저 선수를 쳤다.
"지금 저를 범하시려는 건가요?"
"다 아는 주제에 물어서 뭣 하나?"
흥분이 슬슬 비져나오는 상대답게 반응이 거칠다. 자신 쪽으로 뻗어오는 남자의 손을, 세지는 않지만 저지할 수는 있을 정도로 힘을 주어 쥐었다.
"싫습니다."
"손 놔."
"대사 할 사람이 바뀐 것 같은데요…."
이 정도로 순순히 물러서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강연은 쉽게 손을 물렸다. 그렇다고 말이 고와진 것은 아니었다.
"왜, 남자랑 자려니까 구역질 나? 눈 질끈 감으면 이걸로 두고두고 내 약점 잡아서 마음대로 써 먹을 수 있을 텐데? 화끈한 걸 원하면 지금 당장 나가서 게이가 강간 미수 했다고 복도에서 난동 부려 보지 그래."
"남자와 자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하지만 기분의 문제죠."
남철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쩐지 늘 보던 그 눈빛이 아닌 것 같아 강연은 살짝 놀랐다.
"계장님이 서 팀장님께 가지고 계신 감정은, 아무에게나 풀어서 기분이 나아질, 겨우 그 정도입니까?"
"너, 이 녀석…?"
그러면, 이 녀석은 자신의 감정을 알면서도 일부러 진수와 현민이 함께 가도록 두었다는 말인가? 다시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번에는 상대에 대한 순수한 살의였다.
순식간에 멱살을 잡혔지만, 남철은 지나지게 침착했다.
"계장님은 지금 서 팀장님이 이 팀장님과 함께, 그것도 굉장히 친밀한 사적인 문제로 함께 어디론가 가 버리셨기 때문에 화가 나셨겠죠. 물론 제게도, 그 두 분을 돕느라 계장님을 속였으니 화가 나실 거고요. 하지만 두 분의 소재는 모르고, 저는 여기 있으니 저를 범해서 남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따끔한 경고와 함께 몸으로 화를 푸실 생각이죠?"
차갑게 따박따박 욾어대는 말이 마치 대본 연습이라도 해 온 것 같다.
지남철, 너 이런 녀석이었냐?
"그럼 내 감정은? 내가 네게 괜한 화풀이 하는 건 맞아. 인정해.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내가 네게 손대지 않는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진수는 저 낙하산과 함께 떠나보내고, 너는 그냥 집에 가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왜 나는 진심을 보여 주는데, 너희들은 내 감정을 없는 걸로 치부하는 거냐고!"
"죄송합니다."
"아무렇게나 하는 사과로 때우려 들지 마!"
남철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렇게나 하는 사과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계장님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계장님이 두 분 사이에 끼어드셨다면, 분명히 세 분 사이의 감정의 분열은 더 커졌겠지요. 계장님은 계장님 나름대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을 것이고, 두 분은 사적인 일을 계장님이 알고 계신다는 것이 부담과 반감을 느끼셨을 겁니다. 두 분은 그 사적인 일에 대한 납득할 만한 결말을 내지 못하고 앙금으로 남기겠지요. 그래서, 지금 당장 급한 용무인 두 분의 일부터 처리하기 위해 계장님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 편이 지금 당장 화가 나신대도, 후일 계장님의 감정을 처리할 때엔 더 나을 테니까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남철이 몸을 움직여 앉을 자리를 내어 주었다. 머릿속이 흔들린다. 생각하는 것 조차도 멀미가 난다.
"…궤변이지만 제법 열심히 납득시키려 노력했으니 봐 주겠어. 하지만, 저 녀석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내 감정은 뒤로 밀어 두어도 된다고 말했던 건 잊지 않겠다."
"다음엔 주의하겠습니다."
"됐어. 가 봐. 택시비는 나중에 출장비로 청구해."
어 이럴 것 같구...우리 불쌍한 강연아저씨!
대충 현민씨랑 진수아즛씨랑 이런저런 일을 담판지으러 가는 걸 강연아저씨가 보고 불끈하는게 그걸 남철군이 온몸 바쳐 말리는 내용일 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후비적
Trackback URL : http://goldengirl.cafe24.com/tattertools/trackback/7